허수경
고마웠다, 그 생의 어떤 시간 / 허수경
그때, 나는 묻는다
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
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
그때,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
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
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
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
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 갈 때
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,
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
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
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
신경숙
기차는 일곱시에 떠나네/신경숙
- 프롤로그-슬픈 예감
중국 여행에서 돌아온 날에 나는 세 통의 전화를 받았다. 한 통은 미란의 자살 소동을 알리는언니의 전화. 그리고 잠시 후에 다시 언니의 전화. 세 번째 것은 내가 출연한 라디오 드라마의 청취자라는 낯선 여자가 걸어온 전화. 빈집의 내 책상 위의 메모 노트엔 라디오가 엎어져 있었다. 라디오 밑엔 '이름도 없고 애칭도 없고 의미 있는 행동을 찾아내지도 못하는 익명의 내 목소리'라는 글씨가 아무렇게나 휘갈겨져 있었다. 아마도 여행 전의 어느 날 밤중에 갑자기 천둥과 번개와 함께 쏟아지는 폭우에 놀라 후닥 잠이 깨서 뒤척거리다가 어느 한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 채로 살아온 날들에 대한 울적함을 대신해 적어놓은 모양이었다.
언니의 전화는 내가 현관문을 따고 들어서자마자 걸려왔다. 미란이가 왼쪽 동맥을 칼로 그어버렸다고 했다.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가만히 언니의 말을 듣고 있었다. "넌 놀라지도 않니?" "상태는 어때?" 오래 비워둔 집의 눅눅한 공기가 권태롭게 꿈틀거렸다. 나는 내 몸에 달라붙으려는 공기를 손으로 저지하겠다는 듯 수화기를 들지 않은 한 손을 휘휘 내저었다. "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아." "..." "두 손을 꾹 쥐고서 창문만 바라보고 있어." "..." "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겠어." "..." "뭐라고 말 좀 해봐." 감정이 격해지는지 언니의 목소리에 점점 물기가 서렸다. "내가 대체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. 내가 그 앨 어떻게 길렀니.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찬밥 한 번 안 먹였다."